주요뉴스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1)
상태바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1)
  • 강성률
  • 승인 2021.04.01 10: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성률 교수의 철학 이야기(32)

원효의 아버지는 신라의 하급관리였으며 어머니는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사람은 왜 죽을까,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을까?’ 하는 철학적인 사색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인생무상을 뼈저리게 느끼고 생로병사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화랑이 돼 백제와의 전투에도 참가했는데,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동료들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난 후 큰 충격을 받았으며, 바로 이것이 그로 하여금 불교에 귀의하게 한 중요한 이유였다고 알려져 있다.  

서기 650년, 서른세 살이 되던 해에 원효는 같은 집안사람인 의상대사와 함께 길을 떠났다. 불교의 교리를 더 깊이 알고 또 행세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에 다녀와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시대적 요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나라를 바로 코앞에 둔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의 순찰대에 붙잡혀 스파이 혐의로 심문을 받고, 얼마 후 풀려나서 귀국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신라가 백제를 합병한 다음해인 661년, 이번에는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가기 위해서 의상과 함께 서해안의 당주(지금의 경기도 남양 부근)에 도착했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무역선을 기다리다 해가 저물었다. 그들은 하룻밤 지낼 곳을 찾아 어둠 속을 방황하다가 빈 초막을 찾아 들어가 잠이 들었다.

밤중에 심한 갈증을 느껴 잠을 깬 원효는 주위를 더듬다가 무슨 그릇에 물이 있음을 알고 그 물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벌써 해가 하늘 중천에 떠올라 있었는데 주위를 살펴보니 그가 잠들었던 곳은 초막이 아니라 무덤이었고 맛있게 먹었던 물은 해골에 괴인 썩은 물이었다.

그것을 알아채자마자 오장육부가 뒤집혀 뱃속에 든 것을 죄다 토해내고 말았다. 이때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이 오직 마음 하나’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그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법을 구하러 당나라에 들어가려 했지만 이제 구태여 당나라에 갈 필요가 없게 됐다”고 되돌아왔다. 

원효는 그 뒤로 좋고 나쁨, 길고 짧음, 너와 나를 초월하고 어떤 계율이나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게 됐다. 경주로 돌아온 원효는 엄한 계율에서 벗어나 문란한 생활을 즐겼다. ‘파계승(계율을 깨뜨린 승려)’이라고 하는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다. 이에 대해 그는 “더러움과 깨끗함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속된 것과 참된 것 역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며 맞섰다.

어쨌든 그의 법회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는 잘 생겼고 우렁찬 목소리를 가졌을 뿐 아니라, 설법의 내용 또한 감동적이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도끼에 자루를 낄 자가 없느냐? 내가 하늘을 받칠 큰 기둥을 깎아보련다!”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다.

아무도 그 뜻을 몰랐는데 태종 무열왕(당나라 군사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의 제29대 왕 김춘추)이 이 노래를 전해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은 모양이구나’하고 과부 된 둘째딸 요석 공주를 마음에 두고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게 했다. 관리들이 때마침 문천다리를 건너는 원효를 발견했다. 이때 관리들이 자기를 찾는 것을 눈치 챈 원효는 일부러 다리에서 뛰어 내렸다.

물에 빠져 옷이 젖었으므로 관리들이 그를 가까운 곳에 있는 요석공주의 궁으로 인도했다. 옷을 말리기 위해 옷을 벗고 하룻밤을 지내니 공주와 잠자리를 같이 하며 파계하고 말았다. 그 후 요석 공주는 임신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설총(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히며, 이두 문자를 집대성함)이었다.

[광주교대 교수·철학박사·소설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