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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민에게 고함 '피히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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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민에게 고함 '피히테'
  • 강성률
  • 승인 2021.03.1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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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교수의 철학 이야기(31)

독일의 작은 도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피히테는 가정교사 노릇을 하며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했다. 조금 더 특이한 방법으로 돈을 벌기 위해 여성 잡지를 발행하려고 했지만 어떤 출판업자도 그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다.

비극과 단편소설을 써보기도 했으나 역시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바로 그때 한 대학생이 칸트철학을 가르치는 개인교사가 돼 달라고 요청해왔다. 이 일로 피히테는 한껏 가슴이 부푼다. 그러나 학생의 어머니와 한바탕 싸우고 난 후 또 다시 일자리를 잃는다. 절망에 빠진 그는 칸트를 방문하기로 맘먹는다. 

하지만 오랫동안 존경해 온 ‘쾨니히스베르크의 대철학자’는 그를 따뜻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 요란하게 접근해가는 그에게 칸트는 말대꾸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피히테는 칸트에게 돈을 빌리려 한다. 하지만 이 당돌한 시도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고민 끝에 피히테는 칸트의 관심을 끌 목적으로, 4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걸쳐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적 시론'이란 책을 썼다.

칸트는 이 원고를 칭찬하고 출판업자에게 추천했다. 그런데 이 출판업자는 실수로 저자(피히테)의 이름을 빼놓은 채, 그 책을 출판하고 말았다. 그러자 온 세상 사람들은 이 책을 늙은 칸트가 썼다고 간주했다. 그 후 저자가 칸트가 아니고 피히테임이 밝혀졌을 때는 이 저서의 명성이 빛을 잃기에 너무 늦고 말았다. 피히테는 일약 유명한 인물이 됐고 그 후 예나대학의 교수로 초빙됐다.

처음에는 학생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피히테는 너무나 방자하게 구는 학생단체를 강력하게 비난했고 이때부터 학생들은 그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강의시간에 소동을 부리는가 하면 그의 부인을 큰길에서 모욕했으며, 돌멩이로 연구실의 창문 유리를 깨뜨리기까지 하였다. 노발대발한 피히테는 이에 강력히 대응했다. 그렇지만 주변의 만류로 사태는 겨우 진정국면에 들어갔다.

그런데 한 제자의 논문내용이 문제가 돼 이를 옹호하던 피히테는 다시 어려움에 빠지고 만다. 급기야 교육부 당국에 협박성 편지를 보낸 일로 인해 피히테는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다시 베를린 대학 교수로 복귀한 피히테는 심오한 철학 강의로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사로잡는다.  

저 유명한 연설 '독일국민에게 고함'은 프랑스군에 점령당한 베를린에서 행해졌다. 프랑스혁명을 누구보다 반겼던 피히테는 스스로 왕관을 쓴 나폴레옹이 유럽 전체를 정복하려 하자 ‘그야말로 모든 악의 화신’이라고 간주했다. 그리하여 프랑스 관리가 감시하는 가운데서도 결연히 나폴레옹에 반대하고 나설 것을 호소했다. 프랑스에 대한 조국(독일)의 해방전쟁이 시작되자 피히테는 제자들을 군에 입대시켰고 그 자신도 정훈장교로서 전쟁에 참여하려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장티푸스에 걸린 아내를 간호하다가 그 자신이 감염돼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독일 관념론의 대표적 철학자인 피히테(1762년-1814년)는 사물 그 자체를 인정하는 독단론이 인간으로부터 자발성을 빼앗아간다고 보았다. 반면에 오직 표상(관념)만을 인정하는 관념론은 나(자아)를 자유롭고 독립적이게 해준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피히테는 관념론의 편에 섰다. 그에 있어서는 주관이 외부의 대상(질료)까지를 산출(정립)하고야 만다. 칸트에서의 오성(悟性)이 유(있는 것)에서 유(있는 것)를 만들어내는 우주제작자 같은 것이라면 피히테에서의 정신은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聖靈)처럼 무(없는 것)에서 유(있는 것, 만물)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주관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는 피히테의 철학을 우리는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부른다.

[광주교대 교수·철학박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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