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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는 죽은 친모의 혼(魂)? '왕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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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는 죽은 친모의 혼(魂)? '왕양명'
  • 강성률
  • 승인 2021.03.06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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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교수의 철학 이야기(30)

왕양명의 원래 이름은 운(雲)이었다. 그러나 다섯 살이 되도록 말을 하지 못하자 그의 할아버지가 수인(守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명필 왕희지의 후예이기도 한 양명은 그 어머니가 임신 8개월 만에 조산을 했기 때문에 태어난 이래 줄곧 몸이 허약했다.

청년기 때에는 폐병으로 피를 토하기까지 했다. 양명이 열 살 무렵 어머니가 죽고 새어머니가 들어왔는데 그녀는 양명을 늘 차갑게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양명은 부엉이 한 마리를 사 가지고 와 계모 방에 집어넣었다. 깜짝 놀란 계모 앞에 이미 양명과 입을 맞춘 점쟁이 노파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 부엉이는 죽은 양명 어미의 혼인데, 당신이 양명을 너무 괴롭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오. 그러니 앞으로 또 그를 괴롭히는 날이면 당신이 죽고 말 것이오.”

점쟁이가 돌아간 후로 계모는 양명을 따뜻이 대했다고 한다. 양명은 삼백년 전에 육상산이 주창한 심학(心學)의 깃발을 이어받아 도로써 나라를 구하고자 했다. 28세 되던 해에 진사시험에 합격했는데 당시는 환관인 유근이 권력을 휘두를 때다. 양명이 충신들을 방면해주도록 상소를 올렸다고 곤장 마흔 대를 때려 기절하게 만들더니, 결국 용장 지방의 역승(驛丞, 말과 관련된 벼슬아치)자리로 내쫓고 말았다.

그곳은 첩첩산중이어서 독벌레와 질병이 만연할 뿐만 아니라 거주하는 오랑캐들과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명의 성실하고 인자한 성품에 감동된 야만족들은 마침내 그를 믿고 따르게 됐다. 양명은 원주민들을 다스려 나가는 한편, 끊임없이 사색하며 진리를 깨우치려고 애썼다. 그러던 어느 깊은 밤, 그는 홀연히 격물치지(格物致知,사물의 이치를 규명해 자기의 지식을 확고하게 하는 일)의 도리를 깨달았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큰소리로 노래했다.

“큰 도리란 곧 사람의 마음으로서 이는 만고에 변한 적이 없다네. 금단(金丹)은 결코 밖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네. 삼십 년의 헛된 세월이여, 오늘에야 내가 비로소 후회하는 도다”

환관 유근이 죽자 양명은 서울로 돌아오게 되고, 마침내 대군을 통솔하는 순무(巡撫, 비상시 맡아보던 군대벼슬)가 됐다. 이후 십여 년 동안 큰 공들을 세워나갔다. 하지만 시기하는 무리들의 등쌀에 견딜 수가 없었다. 새로이 즉위한 세종에 의해 벼슬이 주어지고 세록(歲祿, 오늘날의 연봉)일천 석까지 세습케 됐으나 이 역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광서의 전주에서 야만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양명은 총독에 임명돼 반란군을 깨끗이 토벌했다. 그러나 과로하는 중에 폐병과 이질이 겹치고 날씨마저 좋지 않아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어떤 제자가 찾아와 물었다.

“선생님, 무슨 유언이라도 남길 말씀이 없으십니까?” 그는 눈을 깜박거리며 “이 마음이 밝으니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라 대답하고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도가의 철학자들은 도(道)로 세계를 설명하고, 또한 그것으로 우주의 통일성을 설명한다. 또 정주학자들은 이(理)를 우주적 통일성의 실체로 삼는다.

이와는 달리 육상산이나 왕양명(1472년-1528년, 중국 명나라 때의 사상가이자 교육자) 같은 심학 학자들은 심(心)으로 우주를 설명하려 든다. 특히 양명은 밖에 있는 사물을 자신의 마음속으로 끌어들여 그것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주관적 관념으로 객관적 세계를 구성함으로써 천지만물, 삼라만상이 사람의 주관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광주교대 교수·철학박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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