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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얼굴 조차 안보여준 '동중서(董仲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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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얼굴 조차 안보여준 '동중서(董仲舒)'
  • 강성률
  • 승인 2021.01.0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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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교수의 철학 이야기(24)

분서갱유(焚書坑儒, 진시황제가 시행한 탄압정책으로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일)의 대재난을 겪으면서 진나라는 철학사상 방면에서 오랫동안 동면기에 들어갔다. 진나라가 멸망한 다음에도 초나라와 한나라의 전쟁으로 인해 지식인들은 마음 놓고 학문에 정진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유방(劉邦, 중국 한나라의 제1대 황제)이 4년간에 걸친 싸움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정치는 어느 정도 안정됐지만, 유방 역시 한갓 무인(군인)에 불과했다. 그는 유생들을 만나면 갓을 빼앗아 오줌을 싸는 등 별의별 짓을 다했다.

그의 신하들도 마찬가지로 술에 취하면 알몸으로 칼을 빼들고 황제인 유방의 이름을 고함쳐 부르는 등 온갖 추태를 다 부렸다. 또 문제(文帝, 한나라의 5대 황제)때에는 임금과 신하 모두가 황로(黃老, 전설상의 인물에 불과한 황제를 노자와 함께 숭배하는 사상)에 취해 있었다. 

특별히 황후인 두(竇)씨가 황로를 특별히 사랑했는데, 한번은 황후가 한 유생에게 노자의 책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유생은 그 책을 별로 좋지 않게 평했던 바, 이에 황후는 그를 외양간 속에 쳐 넣고 짐승처럼 다루며 벌을 주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황후의 총애를 받고 있던 왕생(王生)이란 사람이 회의 자리에서 갑자기 양말을 벗어들더니 당대 최고의 법관인 장석지라는 사람에게 직접 깁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에 장석지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한 채, 정성을 다해 양말을 기웠다. 일이 다 마무리되자 왕생이 말하기를 “내가 당신처럼 이름난 신하에게 내 양말을 깁도록 한 것은 이 일 외에는 당신을 중하게 쓸 곳이 없기 때문이오”라고 조롱했다.

이처럼 유학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유학자들은 철저히 무시를 당했다. 그러나 상업이 발달하고 논밭이 확장되어 인구가 늘어나자 더 이상 소극적인 황로정치를 가지고는 현실에 적응해나갈 수가 없게 됐다. 이 무렵 왕위에 오른 무제(한나라의 제7대 황제)는 “어질고 바르며 또 임금에게도 직언할 수 있는 선비를 추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대유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동중서다. 그는 “이제부터 유가의 육예(六藝, 예법, 음악, 궁술, 마술, 서도, 수학)안에서 모든 것을 다스려나가되, 이 밖의 학설들을 금지시켜야 합니다.”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옳다 여긴 무제가 그대로 시행하니, 비로소 중국의 정치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됐다. 

학문에 대한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9년-104년)의 고매한 자세는 일찍이 선비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특히 그는 서재에서 연구하는 삼 년 동안 한 번도 문밖에 있는 꽃밭에 마저 나온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학생들을 가르칠 경우에도 서재 안에 박혀 강의를 했기 때문에, 스승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제자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부지런히 학문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유가의 예절에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같은 또래의 학자들마저 그를 스승처럼 존경하였다. 마침내 그의 덕망이 널리 알려져, 무제는 그를 강도왕의 재상으로 임명했다. 동중서는 재상으로서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해나가는 한편, 음양가 및 음양오행의 학설을 적용해보기도 했다.

그 결과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도 했으며, 모든 것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조금 과장된 소리이긴 하겠지만, 그가 미신적인 방법으로 세상의 일을 풀이해 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광주교대 교수·철학박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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