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향락주의의 화신(?) '양자(楊子)'
상태바
향락주의의 화신(?) '양자(楊子)'
  • 강성률
  • 승인 2020.09.21 10: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성률 교수의 철학 이야기(17)

'양자(楊子)'편에 등장하는 양주의 모습은 향락주의의 화신에 다름 아니며, 그 내용은 저속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왜 때를 놓치지 말고 즐겨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설령 백 살까지 산다한들 이 가운데 어린 시절과 노년이 절반을 차지하고, 그 나머지 중에서도 밤잠과 낮잠이 절반을 차지하며, 거기에다가 또 질병과 근심걱정이 그것의 절반을 감소시킨다. 그러고 나서 남는 것은 겨우 십여 년인데, 이 중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생명이 이처럼 짧은데 우리들 인생에 무슨 의의가 있다는 말인가? 돈을 위해, 명예를 위해, 권력을 위해? 그러나 십 년을 살아도 한 번은 죽어야 하고, 백 년을 살아도 한 번은 죽어야 한다. 성인군자도 한 번은 죽어야 하고, 멍텅구리도 한 번은 죽어야 한다. 살았을 때에 요순(堯舜) 임금일 뿐, 죽고 나면 곧 말라빠진 뼈로 변하고 만다.

그러므로 살아 있을 때에 즐거움을 찾아야 하며, 죽은 후의 걱정은 말아야 한다. 죽은 후의 것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화장(火葬)도 좋고 수장(水葬)도 좋고 땅 속에 묻혀도 좋고 비단옷에 휘감겨 돌관 속에 놓여도 좋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데 어찌 살아생전에 쾌락을 찾지 않고 스스로 고생을 사서 하는가?”

여기에서 양주는 이상적인 인물로 공손조와 공손목을 들고 있다. 먼저 공손조는 술을 죽도록 즐기는 사람이다. 

“그의 방안에는 술독이 일천 개나 쌓여 있고 술을 빚는 누룩은 골마루에 가득 차 있다. 술 빚는 냄새는 문 밖 십 리에까지 코를 찌른다. 그가 술을 마실 때는 모든 것을 잊는다. 다른 사람의 이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척들의 크고 작은 일에도 관심이 없다. 살고 죽는 일, 심지어 사물이 눈앞에 있는지 없는지 마저도 잊어버린다. 찬물을 뒤집어씌우고 불로 지지고 칼로 찔러도 모를 정도다.

또한 공손목은 대단한 호색한이다. 그는 뒤뜰에 몇 십 개나 되는 골방을 만들어 놓고 예쁘다는 아가씨들을 모두 가려 뽑아 그 방에 가득 채워 놓는다. 그리고 일단 여자와 놀기 시작하면 뒷방에 누워 모든 방문객을 사절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석 달에 한 번 정도나 문 밖에 나오는데, 그러고서도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빛이다.

만약 어느 시골에 예쁜 여자가 있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어이 끌어온다. 그리고 자기 것으로 만들 때까지 결코 단념할 줄을 모른다. 그들 두 사람은 글을 쓰고 학설을 세우는 데에는 아무런 흥미가 없으며, 후세에 이름을 떨치는 데에도 관심이 없다. 돈 보기를 마치 오물처럼 여기며, 자기의 생명마저 돌보지 않는다. 오직 육체적인 자극과 관능의 만족만을 추구한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양주사상과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위의 책이 위조됐다는 설도 있는데다, 양주 그 스스로는 매우 다정 다감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기 때문이다. 양주(楊朱 양자의 본명)는 중국 전국시대 전기의 철학자로서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貴生), 자기 자신을 중하게 여기며 외부의 것들(재산, 권력, 명예 등)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해 스스로의 본성을 온전하게 할 것 등을 주장했다.

또한 권력에 의한 지배가 노골화되는 시점에서 개인의 삶을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스스로는 조용하게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유유자적했던 진정한 은자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광주교대 교수·철학박사·소설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