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그릇의 빈 곳이 쓰임 받는다" 노자(3)
상태바
"그릇의 빈 곳이 쓰임 받는다" 노자(3)
  • 강성률
  • 승인 2020.07.03 11: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성률 교수의 철학 이야기 ⑭

유가에서 말하는 도란 인간의 윤리에 국한된 것이었다. 하지만,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도란 온 천지만물, 모든 자연의 이법(理法)으로서 우주의 근본원천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궁극적 원인으로서, 모든 법칙 중의 법칙이자, 모든 척도 중의 척도다.

이에 대해 노자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 도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것은 우리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에는 어떠한 빛깔도 어떠한 소리도 어떠한 형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어떤 모양을 갖는 존재는 모두 도에서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도는 어떠한 시간적·공간적 한계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극(無極)이며 무이다. 그렇다고 이 무가 단순히 텅 비어있는 공무(空無)인 것은 아니고, 도리어 모든 존재를 생겨나게 하는 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노자는 무의 효용성을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수레바퀴에 있어서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한 바퀴의 통에 모여 있긴 하지만 그 가운데가 비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수레를 사용할 수 있으며, 또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들되 그 빈곳이 있기 때문에 그릇을 쓸 수 있으며, 문과 창문을 뚫고 방을 만들되 그 가운데가 비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방을 쓸 수 있다. 그러므로 유(有)가 이용되는 까닭은 무가 작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현대인들은 공허한 마음을 물질로 채우려는 경향이 있다. 아파트도 큰 것으로 자동차도 대형으로, 쇼핑도 대형 백화점에서 대규모로.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마치 바다에 빠진 사람이 바닷물로 목을 축이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이 나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남들 앞에서 한껏 자랑하고 돌아서면 허무해지는 그 마음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방법은 딱 하나. 욕심을 버리면 된다. 그러므로 노자는 우리더러 늘 마음(욕망)을 비우라고 충고한다. 왜 그럴까? 세상 이치가 그렇게 돼 있기 때문이다. 가령, 굽은 나무가 제 수명을 누리고(쓸모가 없는 나무는 베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벌레는 몸을 굽혀 폄으로써 앞으로 나아가고(두 발 나아가기 위해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겸손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뜻), 물은 파인 곳에 고이고(겸손한 마음에 진리가 깃들인다, 혹은 겸손한 자에게로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뜻), 옷은 닳아져야 새것을 입으며 욕심이 적어야 만족을 얻고, 아는 것이 많으면 도리어 미혹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끔 우리가 보듯이, 크게 이룬 것(大成)은 모자란 것 같으나 그 쓰임새에 그침이 없고, 크게 찬 것은 빈 것 같으나 그 쓰임에 다함이 없다.(큰 사람은 겉으로 평범해 보이지만, 크고 작은 일에 항상 유용하다.) 크게 곧은 것은 굽은 것 같고(큰 진리는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고, 큰 사람은 좀 이상하게 보인다), 크게 교묘함은 서툰 것 같고, 크게 말 잘함은 말더듬이 같다.

이와 같이, 노자에서의 윤리는 우리에게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처해 소박하고 유연하게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광주교대 교수·철학박사·소설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