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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부장관(Minister for Lonel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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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부장관(Minister for Loneliness)
  • 나동주
  • 승인 2019.11.26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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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동주∥前 영광교육장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으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르텅스 블루(Hortense Vlou) '사막'-

프랑스 '파리 지하철 공사'가 매년 공모하는 시 콩쿠르에서 8천여 편의 응모작 중 1등으로 당선된 ‘오르텅스 블루’의 시입니다. 시인 류시화의 시집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에 이 시의 게재를 허락받기 위해 대신 찾아간 류시화의 친구에게 오르텅스 블루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내가 느낀 외로움은 이 ‘너무도’로는 표현이 안 돼.”
“그래서 시 게재를 허락할 수 없어. 시가 완벽하지 않으니까.”

도대체 작자가 느낀 외로움의 깊이는 어디쯤일까? ‘너무도’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 외로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살다보면 우리는 때때로 최상위의 적막이 흐르는 사막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주변엔 검은 모래뿐 생명체라곤 흔적조차 없는 절대고독의 외로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다시금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애절함 속에서 마모(磨耗)된 인생의 파편을 부여잡고 자신의 외로움과 조우(遭遇)하게 됩니다.

영국은 지난해 이처럼 극단적인 외로움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트레이시 크라우치(Tracey Crouch)를 '외로움부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이 생경(生硬)한 부서의 설치는 생소하고도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외로움이 야기(惹起)하는 갖가지 사회적 문제점을 감안할 때 영국의 '외로움부'신설은 발상의 전환이 번득이는 대단히 시의적절(時宜適切)한 묘안이라 할 것입니다. 국민이 우선인 참된 민주주의란 이런 것입니다.

‘외로움’은 전염병처럼 번지는 현대병입니다. 사실 외로움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주관적 감정이며,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해 왔습니다. 그것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고립성과 소외감이 오래 지속되어 부정적인 사고와 행동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때 외로움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런 사회적 현상을 의미 있게 감지한 영국은 '외로움부'를 새롭게 설치하고 장관을 임명한 것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영국의 이 같은 결정은 전혀 생뚱맞거나, 어처구니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 사회를 면밀히 진단하고 그 대책을 마련하고자 하는 혜안(慧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6,600만 명의 인구 중에 약 900만 가량이 외로움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는 '외로움부' 설치의 근본적인 단초(端初)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영어권의 나라에선 16세기까지 ‘외로움’이란 단어인 ‘loneliness’는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17세기에는 ‘있으나 잘 쓰지 않는’ 용어사전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16세기까지 영어권의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을까? 전술(前述)하였듯이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 외로움 그 자체는 미미하게나마 존재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결국 무한경쟁의 각박한 현대사회가 외로움을 확대 재생산하여 그 온전한 모습을 우리 일상에 끌어다 놓은 것입니다. 전에 없던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독’과 ‘외로움’은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입니다. 고독이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라면, 외로움은 ‘소통이 단절된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가 흔히 ‘고독사(孤獨死)’라고 부르는 것의 제대로된 이름은 ‘외로운 죽음’입니다. 사회가 제공하는 보호를 받지 못하고 맞이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으로 외딴곳에 멀리 떨어져 있어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소통이 단절된 상황에서 삶의 모서리를 붙들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붐비는 사람들 속에서도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영어권 나라에서 17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외로움이라는 용어가 참으로 무섭게 다가옵니다.

“타인에게 보이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외로워진다”는 데이비스 리스먼(David Riesman)의 '고독한 군중'이나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할 때 더 날카롭게 빛난다”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직설(直說)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외로움의 현실을 웅변으로 증명합니다. 특히 아렌트는 그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 마지막 장에서 집단적으로 외로워진 군중이야말로 20세기가 만든 급진적인 ‘악의 실체’라고까지 진단합니다. 급기야 외로움이 악으로 변신한다는 주장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외로운 것일까? 외로움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떤 위험을 초래하는가? 다산 정약용뿐만 아니라 조선사의 뛰어난 학자들이 학문의 마지막 단계에서 만난 것은 ‘마음공부’ 즉, 심경(心境)이었습니다. 마음은 내 것이지만, 평생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외로움이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걸림돌이 결국 자신이었음을 자각할 때 마음을 버리고 비우는 방법을 택합니다. 그러나 마음이란 살아가기 위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툰 끝에 결국은 화해하는 것입니다. 마음과의 화해는 외로움을 극복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조상들의 지혜가 넘실거립니다.

이렇게 보면, 외로움의 대응 전략을 마련하고 처방하기 위한 영국의 '외로움부' 신설은 고독한 군중을 위한 제도적 배려이고, 마음공부를 통해 마음과의 화해를 주선한 현실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외로움을 국가 차원의 어젠다(agenda)로 설정하고 이의 해결을 위한 범정부 차원의 성공적 조직 개편의 일환이었습니다. 사람 중심의 선진국의 품격이 제대로 묻어납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독신자, 혼밥, 홀로족, 우울증, 경쟁, 입시, 자살. 우리나라가 이 제도의 벤치마킹을 신중히 고려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외로움에 대한 기초 정보조차 갖지 못한 우리나라도 당장 외로움을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국가 차원의 관리와 도움이 필요한 때입니다. 단절된 사회가 아니라 연결된 사회로써 외로움에 맞서기 위한 궁극적인 전략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천국에서조차 혼자일 수 없다’는 이탈리아 속담이 일안고공(一雁高空)의 필자를 더욱 애끓게 하는 늦가을입니다. 급기야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의 명언이 비수(匕首)가 됩니다.

“‘고독’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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