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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피기 좋은 날
  • 나동주
  • 승인 2019.10.3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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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동주∥前 영광교육장

수주(樹州) 변영로의 〈논개〉는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산화(散花)한 의기(義妓) 논개의 충절을 형상화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 사랑보다도 강하다.

소월(素月) 김정식의 〈진달래꽃〉은 단순히 사랑하던 연인과의 이별을 개인적인 감정으로 노래한 시가 아니라, 일제 치하의 식민 상황에서 우리 민족이 동경하고 찾아 헤매던 상실된 주권을 애절하게 노래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 보내 드리오리다.

이 거대한 두 민족 시인을 존경한 사람은 청록파(靑鹿派)의 한 사람이었던 목월(木月) 박영종이었습니다. 박영종의 호(號) ‘목월’은 수주(樹州)에서 ‘나무(木)’을 소월(素月)에서 ‘달(月)’을 각각 따와 그의 호를 ‘목월(木月)’이라 하였다니 가히 그 존경심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목월은 6·25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52년, 그의 제자인 A양과 사랑에 빠져 갑자기 종적을 감춥니다. 당시 목월은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였는데 가정과 명예를 모두 버린 채 홀연히 사랑하는 연인과 사라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랑의 그물망에 갇힌 목월은 엄청난 갈등 속에서도 결국은 사랑을 선택한 것입니다.

얼마 후 목월의 아내는 그들이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목월을 찾아 나섭니다. 막상 목월이 살고 있는 집에 도착한 그의 아내는 아무도 없는 빈 방의 초라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얼마간의 돈 봉투와 겨울옷 보따리를 내밀고 목월을 만나지도 않은 채 서울로 떠나 버립니다. 목월의 아내는 과연 이들을 용서한 것일까요, 아니면 무서운 복수를 한 것일까요?

뒤늦게 집에 돌아온 목월은 아내의 따스한 배려에 감동한 나머지 그 연인과 헤어지기로 결심합니다. A양은 목월에게 사랑과 인생을 걸었지만 목월은 아내의 무조건적인 헌신을 목격하고 지체 없이 이별을 선택한 것입니다. 시인 임용운의 시어(詩語)처럼 ‘이별은 단풍처럼’ 야속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목월은 사랑하는 연인 A양에게 이별의 선물로 한 편의 시를 지어 줍니다. 그리고 그 시에 김성태가 곡을 붙여 탄생한 노래가 바로 〈이별의 노래〉입니다.

기러기 울어 예는 /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 가을은 깊었네.

소설가 박민규는 ‘모든 사랑은 오해이며,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는 다짐 또한 오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목월과 A양의 한바탕 불같은 사랑은 지극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판화가 이철수의 작품은 채워진 공간보다는 빈 공간이 더 많습니다. 여백이 더 많은 판화는 불현듯 인생을 사색하게 만듭니다. 그의 판화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당신은 힘들지요?” 목월의 아내가 목월에게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 말이 아니었을까요?

목월이 제주도를 떠나는 날, 제주에서 문학 활동을 함께 하면서 알게 된 제주제일중학교 양중해 국어교사가 시를 쓰고, 같은 학교 변훈 음악교사가 곡을 붙여 만든 노래가 불후의 명곡 〈떠나가는 배〉입니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소설가 장석주는 그의 저서 「사랑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사랑에 목숨을 걸던 예전에 견줘 오늘날의 사랑은 그 위엄이나 명예를 잃은 채 쪼그라들고 남루해졌다. 그것은 오늘날의 사랑이 위험과 모험이 배제되고 열정과 신비가 휘발된 채, 편의점에서 쉽게 사는 소비재 같이 지나치게 가벼워진 탓이다.”라고 했습니다. 목월의 사랑은 비록 위험과 모험을 감수하고, 열정과 신비로 충만하였다고 해도 약간의 얼빠짐, 만용 등과 같은 무모함이 감지됩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상대에게서 내 존재 안의 결핍된 부분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혼자임을 자각하는 일은 타인과의 사랑을 꿈꾸게 만드는 전제조건이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목월은 이 위험한 사랑을 통해 A양에게서 자신의 결핍된 어느 부분을 충당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을 버리고, 선망의 대상인 자신의 직업까지 팽개쳐가면서 자신은 ‘고독한 혼자임’을 자각한 감성의 발로(發露)가 작동되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사랑은 순수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시작과 동시에 끝을 향합니다. 특히 그 사랑이 로맨스든, 불륜이든 정상적인 형태를 갖지 못한 사랑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더없이 골치 아프고 어려운 시련으로 접어드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말처럼 사랑은 ‘가장 괴이한 모순’으로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목월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한순간의 빗나간 열정이 빚어낸 참사입니까, 아니면 고귀한 사랑의 세레나데(Serenade)입니까?

비록 사랑의 세레나데가 아니더라도, 열정이 빚어낸 참혹한 참사가 될지언정 속절없이 불같은 로맨스를 꿈꾸어 보는 중년의 늦가을 오후, 가을비가 촉촉이 내립니다. 바람피우기 참 좋은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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